제7대 세조실록 해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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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조실록》은 세조가 승하한 다음해, 즉 예종(睿宗) 원년(1469) 4월 1일(갑인)에 춘추관(春秋館)에 실록청(實錄廳)을 설치하고, 신숙주(申叔舟)·한명회(韓明澮)를 영춘추관사(領春秋館事), 최항(崔恒)을 감춘추관사(監春秋館事), 강희맹(姜希孟)·양성지(梁誠之)를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 이승소(李承召)·김수령(金壽寧)·정난종(鄭蘭宗)·이영은(李永垠)·이극돈(李克墩)·예승석(芮承錫)을 동지춘추관사(同知春秋館事)에 임명하여 편찬하기 시작하였다. 《세조실록》은 처음에 6방(六房)으로 나누어서 편찬하였으나, 그 해 11월 예종이 승하하고 성종(成宗)이 즉위하자 6방을 3방으로 줄이고 편찬을 계속하여 2년 후인 성종 2년(1471) 12월 15일(임오)에 완성하였다. 이어 《예종실록》을 편찬하고, 성종 4년(1473) 6월 8일(정묘)에 이르러
<世祖惠莊大王實錄> 해제
1.《세조실록》의 편찬 경위와 편수관
《세조실록》은 조선 제7대 국왕 세조의 재위 기간(1455년 윤6월 ~ 1468년 9월) 14년간의 역사를 기록한 사서이다. 정식이름은 《세조혜장대왕실록(世祖惠莊大王實錄)》이며, 모두 49권 18책으로 간행되었다. 끝의 2권은 세조 대에 제작한 악보(樂譜)를 수록한 것으로, 《세종실록》의 악보와 함께 아악(雅樂)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된다. 조선시대 다른 왕들의 실록과 함께 국보 제151호로 지정되었다.
세종·문종 실록과 함께 세조·예종 실록도 인쇄하였다. 세조 12년(1466) 양성지의 건의로 당시 새로 주조한 소활자로 세종·문종 실록을 인쇄하기 시작하여 성종 3년(1472) 7월에 완료하였으므로, 계속하여 새로 편찬한 세조·예종 실록도 인쇄하여 성종 4년(1473) 6월에 출판을 완료하였다. 이때 각기 3부씩 인쇄하여 사본인 정초본(正草本)은 춘추관 실록각에 두고, 인본은 충주·성주·전주 사고에 1부씩 분장하였다.
2.《세조실록》의 내용
세조(世祖: 1417~1468)의 이름은 유(瑈), 자는 수지(粹之)이며, 세종과 소헌왕후 심씨(昭憲王后沈氏)의 둘째 아들이다. 처음 진평대군 (晉平大君)으로 봉해졌다가, 1445년(세종 27)에 수양대군(首陽大君)으로 개봉되었다. 자질이 영민하여 유교 경전과 사서(史書)에 능통하였고, 무술을 좋아하여 병학(兵學)·역산(曆算)·음률(音律)·의약(醫藥)·복서(卜筮)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하였다.
세조는 즉위 후에 군비를 강화하여 두 번이나 압록강·두만강 건너편의 여진족을 정벌하고, 이징옥(李澄玉)의 난(1453)과 이시애(李施愛)의 난(1467)을 진압하였다. 또한 안으로 국가의 모든 제도를 정비하고 《경국대전(經國大典)》과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를 편찬하여 조선 왕조의 통치 기반을 완성하였다. 그러나 그는 12세의 어린 조카 단종이 즉위하자, 한명회(韓明澮)·권남(權擥)·정인지(鄭麟趾)·한확(韓確)·최항(崔恒)·신숙주(申叔舟) 등과 공모하여 단종 원년(1453) 10월에 좌의정 김종서(金宗瑞), 안평대군(安平大君) 이용(李瑢), 영의정 황보인(皇甫仁) 등을 죽이고 그 일파를 귀양보낸 ‘계유 정난(癸酉靖難)’을 일으켰다.
단종 3년(1455) 윤6월 11일(을묘)에는 선양(禪讓)의 형식으로 단종의 왕위를 찬탈하였다. 이와 같이 세조가 불법으로 왕위를 찬탈하자, 성삼문(成三問)·박팽년(朴彭年)·하위지(河緯地)·유성원(柳誠源)·성승(成勝)·유응부(兪應孚)· 권자신(權自愼)·허조 등이 그 해 겨울에 단종의 복위를 모의하고, 이듬해 6월 1일 창덕궁에서 명나라 사신을 접대하는 자리를 이용하여 세조와 세자를 죽이고 단종을 복위시키려고 하다가 동모자 김질의 밀고로 모두 체포, 처형되었다.
그 후 1년을 지나 세조 3년(1457) 6월 21일(계축)에 단종을 노산군(魯山君)으로 강봉하여 영월(寧越)에 안치하였다가, 그 해 10월에 목매어 죽게 하였다. 이와 같이 세조와 세조조의 소위 정난·좌익 공신인 신숙주·한명회·최항·강희맹·양성지 등은 세조 즉위 당시에 불의한 행동을 하였기 때문에, 예종 원년(1469) 4월 1일 《세조실록》을 편찬할 때, 혹은 그들의 비행을 기록한 사관(史官)의 사초(史草)가 있을까 하여 사초에 사관의 성명을 기록하게 하였다. 이렇게 이름을 쓰게 함으로 말미암아 민수(閔粹)의 사옥(史獄)이 일어났다.
민수의 사초 가운데에 양성지·신숙주·한명회· 임원준(任元濬)·홍윤성(洪允成)·윤사흔(尹士昕)·김국광(金國光)·강효문(康孝文) 등 세조조의 공신에 대한 비행을 기록한 것이 많았다. 그는 신숙주·한명회·양성지가 주가 되어 《세조실록》을 편찬하자 크게 불안하여, 실록청 낭청 중 친구였던 기사관 강치성(康致誠)을 통하여 사초를 도로 반출하여 위험한 문구를 개찬하거나 삭제하여 바쳤다. 후에 이 사실이 발각되어 민수·강치성과 기타 관계자 10여 명을 하옥하고, 다른 사초도 조사한 결과 기사관 원강숙(元康叔)의 사초 가운데에도 당초 기록을 삭제한 것이 발견되었다.
예종은 친히 이들을 국문하여 마침내 원강숙· 강치성을 사형에 처하고, 민수는 곤장 1백 대를 때려 제주의 관노(官奴)로 삼았다. 《세조실록》은 세조조의 소위 정난·좌익 공신인 신숙주·한명회·최항·강희맹·양성지가 주가 되어 편찬하고, 편찬 당시 사초에 사관의 성명을 기입하게 하여 민수의 사옥이 일어났으므로, 사관들은 모두 세조 즉위 당시의 일과 대신의 비행을 직필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세조실록》 중에는 세조 즉위 당시의 일이 모두 합법적인 것으로 기록되었을 뿐만 아니라, 세조조 공신에 대한 비판 기사도 거의 없는 편이다. 그러므로 《세조실록》 중 세조가 단종을 폐하여 죽이기까지 한 권력 투쟁에 관한 기사는 그대로 믿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이 때문에 김종직이 조의제문(弔義帝文)과 술주시(述酒詩)를 지어 세조가 단종을 폐하여 죽인 사실을 초(楚)나라 항우(項羽)가 의제를 죽인 데에 비유하여 기술하고, 그 제자 남효온(南孝溫)은 《육신전(六臣傳)》을 지어 세조와 신숙주·한명회 등을 통렬히 비난하였다.
자료출처 : http://sillok.histiry.go.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