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오보 서문
주나라의 종맹宗盟에서는 같은 성씨[同姓]를 앞세우고 다른 성씨[異姓]를 뒤로 하였다.
'성姓'이라는 것은 ‘태어남[生]’을 뜻한다. 그러므로 성姓은 위로는 조상이 낳은 계통을 하나로 이어 주고, 아래로는 자손들이 어디에서 나왔는지를 서로 연결해 주는 것이다.
조상을 높이고 종족 간의 화목을 돈독히 하는 일은 아득한 상고시대에도 이미 그러하였는데, 하물며 세상의 도의가 쇠퇴한 후세에 있어서야 더 말할 것이 있겠는가?
우리 오씨吳氏는 신라시대에 나주에서 일어났으나, 고려 중엽에 이르러 가문의 문서와 족보가 소실되어 세계世系가 거듭 실전되었으므로, 낭장공郞將公(1世 언偃)을 비로소 중조中祖를 삼게 되었다.
『동사東史』에 기록된 김부왕金溥王(신라 경순왕)의 부마駙馬가 어느 시대 사람인지는 알 수 없고, 지리지[輿地勝覽]에 실려 있는 장화왕후莊和王后의 흥룡동興龍洞에 대해서도 장화왕후가 태어나고 성장한 마을이 있다는 사실 정도만 전할 뿐이다.
삼국시대 무렵 우리 가문의 성쇠에 관한 이야기는 오직 서윤공庶尹公(7世 원謜, 1511-1590)의 옛 서문에 간략히 보일 뿐이다. 그 서문이 지어진 때는 종인이 화재로 보첩을 잃기 전의 일이어서, 그 글은 진실로 옛 사실을 고증할 만하였다.
그러나 정유재란을 겪으면서 국재공菊齋公(7世 겸謙, 1496-1582, 금양군)과 송정공松亭公이 수집하여 편찬한 원본마저 함께 없어지고 말았다. 우리 종중의 불행이 이처럼 심하였으니, 아!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도암공韜菴公(9世 희길希吉, 1556-1623)에 이르러서는 사악한 학설을 물리치고 바른 도를 지키는 학문으로 특별히 선조宣祖 때 조정의 장려와 발탁을 받았다. 명곡공明谷公(9世 희도希道, 1583-1623)은 문장과 출처出處의 의리가 올바르고 뛰어났으며, 또 장릉長陵(인조仁祖) 초년에 명성을 떨쳤는데, 이 두 분께서는 집안에 제대로 된 가승家乘이 없는 것을 매우 걱정하였다.
그리하여 「통계소기統系小記」가 먼저 망재望齋의 책상 서랍[巾衍] 속에서 나오고, 뒤이어 도암공의 초보草譜가 완성되었다.
애써 차례로 판각하여 간행하려 하였으나 뜻대로 되지 못하였다. 그 뒤 지천공支川公(10世 이규以奎, 1608-1653, 명곡공 2子)과 석문공石門公[10世 희도希道, 1618-1666, 명곡공 3子(出系)]은 문장이 찬란하고 아름다웠으며, 잇달아 벼슬길에서 이름을 빛냈다. 장계공藏溪公(10世 이정以井, 1619-1655, 명곡공 4子)은 오로지 학문에 마음을 쏟았으나 또한 세상에서 뜻을 펴지 못하였다.
오직 나의 증조부이신 옥헌공玉軒公(11世 기석祺錫, 1651-1702, 장계공 3子)께서는 선대의 뜻을 이루지 못한 것을 안타깝게 여겨 손수 족보를 고치고 다듬으셨으나 힘이 미치지 못하여 완성하지 못하셨다. 그때 남긴 옛 표지와 기록들은 아직도 유품 상자 속에서 그 향기를 전하고 있다.
백발이 되도록 경전을 연구하신 덕양공德陽公(12世 대관大寬, 1656-1708, 지천공 손자)께서도 헛되이 긴 탄식만을 남기셨고, 음서蔭敍의 벼슬길을 헌신짝처럼 버린 도사공都事公(12世 대준大濬, 1680-1733, 석문공 손자)께서도 끝내 가난하게 지내면서 이 일에 마음을 다해 애쓰셨다.
앞서 말한 여러 세대는 우리 가문이 번성하던 시기였으며, 뒤에 나온 여러 선조님들은 온 종중이 의지하고 중히 여기던 분들이었다. 그럼에도 모두 뜻을 품은 채 미처 그 일을 이루지 못하였으니, 이는 후세의 미약한 자손들이 함께 한탄하여 마지않는 일이었다.
아아! 어느 가문인들 족보를 편찬하는 일이 어렵지 않겠는가마는, 백 년 동안이나 미루어져 온 어려움이 어찌 우리 종중보다 더 심한 곳이 있겠는가?
다행히 영조英祖 정묘년丁卯年(1747년)에 이르러 여러 부형父兄(숙부, 형님)들이 힘을 합친 덕분에, 그로부터 3년 만에 비로소 편찬을 완성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구보舊譜(정묘보)이다.
천 년 동안 전해 내려온 옛 기록이 하루아침에 한 족보로 완성되었으니, 마치 때를 기다렸다가 이루어진 일과 같았다. 다만 활자의 인쇄가 조잡하고 둔탁하였으며, 범례에도 잘못된 곳이 많아, 종중에서는 오래전부터 이를 안타깝게 여겨 왔다.
옛 족보를 편찬한 뒤, 한 갑자甲子(60년)가 돌아오고 자손의 갈래가 날로 번성하니, 이들을 다시 거두어 족보에 수록하는 일이 더욱 시급해졌다.
이에 무오년戊午年(1798년)에 사종형四從兄 14世 양원養源(1730-1807, 석문공 후손) 씨가 족보를 중간重刊하자는 논의를 처음 제기하자, 사제四弟 영원泳源(1755-1815, 석문공 후손)과 족질族姪 15世 상록相祿(1741-1814, 참판공 후손)ㆍ상성相成(1741-1825, 도림공 후손)이 일을 나누어 맡았다.
재물을 모으고 힘을 합쳐 일을 추진하였으나, 그 일이 지체되어 10년에 이르도록 책을 완성되지 못한 채, 사종형께서 먼저 세상을 떠나셨다.
아우 영원은 맡은 일이 끝내 중도에 버려질까 크게 두려워하여 초고草藁를 가지고 서울의 제 집을 찾아왔고, 서로 마주 앉아 슬피 눈물을 흘렸다.
그리하여 구보(정묘보)를 바탕으로 다시 정리하되, 별록別錄에 대하여는 면밀히 살펴 거짓되거나 와전된 것을 바로잡아 없애고, 방주傍註(이름 곁의 주석)는 번잡한 내용을 삭제하여 간결하게 하는 데 힘썼으며, 전체 내용을 바로잡고 윤색하여 한층 정밀하게 하였다.
삼가 종족을 결속하고 세계世系를 통일하며 자손을 서로 이어 주는 족보 본래의 체제를 지켰으니, 위로는 선조께서 자손을 한결같이 사랑하신 뜻을 저버리지 않고, 아래로는 같은 조상의 자손들이 서로 길 가는 남처럼 소원해지는 탄식을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으니, 이 어찌 우리 종중의 큰 다행이 아니겠는가?
족보의 간행을 마치자, 여러 종친들이 내가 이 일에 참여하여 그 경위를 알고 있다 하여 그 사실을 기록해 달라고 부탁하였다. 내 어찌 분수에 넘고 외람됨을 모르겠는가마는, 삼가 그 일의 처음과 끝을 위와 같이 기록하는 바이다.
후손 사간원司諫院 대사간大司諫 정원鼎源이 삼가 쓰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