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주(금성)오씨 전자족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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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오씨 가문의 개요

오씨의 선세先世 가문은 삼한三韓시대 나주羅州(=금성錦城)에 터잡아 살아온 것으로 전하며, 오씨가 세상에 널리 알려진 역사 기록(고려사)은, 나주 출신으로 고려 태조 왕건王建의 비妃인 장화왕후莊和王后가 오씨 가문에서 나온 이후부터이다.

그러나 아주 요원遙遠하고 선계先系 기록이 유실되어 「나주오씨대동보羅州吳氏大同譜」에는 고려 중엽의 진사공 오숙규吳淑珪 선조님을 "중조中祖"로 하고, 그 후손인 고려 말엽 중랑장공 오언吳偃 선조님을 '1世' 로 정립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온 계통과 역시 후손인 오제吳偍 선조님을 '1世' 로 정립하여 세계를 이어온 두 계통으로 되어 있다.

나주오씨 족보의 보계譜系에 맨 처음 등재된 오숙규吳淑珪 선조님을 “시조始祖”로 정립하지 않은 이유는, 진사공 오숙규 선조님은 고려 중엽 사람이므로 이 분 윗대에도 반드시 명현(이름난 현인)과 달관(고위 관직자)으로 빛나게 일컬을 만한 분이 계셨겠지만, 세대世代와 이름名諱를 고증할 근거가 없었다. 그러므로 비록 진사공을 족보 기록의 시작으로 삼았지만, “시조始祖”라는 두 글자는 쓰지 않고 단지 이름諱만을 적는다고 1747년 발행 나주오씨 최초 족보인 '정묘보' 범례 첫째 항에서 밝히고 있다.

1810년 발행한 나주오씨 족보(경오보) 2차 수보 시에도, ‘정묘보’ 보계譜系에 맨 처음 등재한 오숙규 선조님을 “시조始祖”로 정립하지 않고 “중조中祖”로 정립하게 된 이유에 대하여, 문헌을 잃어버려 시조(오숙규 윗대 선조님을 말함) 이하 상계上系 명휘가 전해지지 않아, 고려 중엽 사람인 진사공 오숙규 선조님부터 가승家乘의 맨 처음에 등재하게 되었다. 그러므로 구보(정묘보)에 따라 진사공으로부터 시작하지만 “중조中祖”라고 적는다고 '경오보’ 범례 첫째 항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후손인 중랑장공 오언吳偃 선조님을 "기세조起世祖(1世)"로 정립한 이유에 대하여, 보계상 맨 처음에 등재(시보지조始譜之祖)되신 중조 진사공 오숙규 선조님부터 중랑장공 오언 선조님 사이에는 계첩을 잃어버려 전해지지 않은 대수代數가 얼마나 되는지 알 수가 없어서 중랑장공 오언 선조님 이름 위에 아들 “자子”자를 써서 세계를 잇는 것은 부당하므로, “후손後孫”이라고 칭하여 다른 줄에 따로 쓰고, 이로부터 대수代數를 계산하고 각 파가 나누어진 근원으로 삼는다고 ‘정묘보’ 범례 둘째 항에서 밝히고 있다.

즉, 위와 같은 연유로, 중조 진사공 오숙규 선조님을 기세조(1世)로 정립하지 않고, 후손이지만 그 이후 세계의 이음이 분명한 중랑장공 오언과 오제 선조님을 ‘기세조起世祖(1世)’ 로 정립하였다.

아울러, 본관本貫을 나주羅州 또는 금성錦城으로 호칭하는 것은 위와 같이 우리 가문의 원조遠祖님들의 세거지世居地가 나주 또는 금성(나주의 옛 지명)인데서 유래된 것이다.

중랑장공 오언吳偃의 현손玄孫인 5世 오자치吳自治는 조선 세조 때 무과에 급제하고 1476년(세조 13년)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 2등에 책록된 뒤 병조참판을 지냈고, 나성군羅城君에 봉해졌으며, 시호諡號는 양평襄平이다.

또한 7世 오겸吳謙은 대과大科에 급제하여 남평 현감을 시작으로 전주 부윤, 경상도 관찰사, 사헌부 대사헌, 예조ㆍ호조ㆍ병조ㆍ 이조 판서 등 중앙ㆍ지방 주요 관직을 두루 거쳤으며, 1550년(명종 5년)에 금양군錦陽君에 봉해졌고, 선조 때 실록청 도청 당상으로 명종실록 편찬에 참여하고 우의정에 이르렀으며, 「해동명신록海東名臣錄」에도 수록되었고, 시호諡號는 정간貞簡이다.

그리고 9世 오희길吳希吉은 임진왜란 때 전주사고全州史庫의 조선왕조실록을 내장산으로 옮겨 병화로부터 조선왕조실록을 보존하는데 큰 공을 세운 역사적 인물이다.

나주오씨는 조선시대 문과(대과와 사마시)와 무과 급제자가 총 70여 명에 이르는 등 이곳 관향貫鄕 나주羅州의 명문名門이다.

현대 주요 인물로는, 법조인으로 광주고등법원장ㆍ서울고등법원장ㆍ대법관을 지낸 오필선吳弼善과 교육가로서 금북중학교의 설립자이고 8대 국회의원을 지낸 오중렬吳重烈 등이 가문을 빛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