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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보 서문

한 집안에 족보가 있게 된 것은 그 유래가 참으로 오래되었다.
조상을 높이고 종족을 공경하며, 친족 간의 정을 돈독히 하고 인륜의 차례를 밝히는 일은 예로부터 그러하였다.

정부자程夫子가 말하기를 “사람들의 마음을 거두어 잡고, 종족을 하나로 모으며, 풍속을 돈후하게 한다.”라고 하였다. 이것이 족보를 편찬하는 큰 뜻이다.

족보의 법도가 분명해지면 사람마다 자신의 친족을 친애하게 된다. 천 갈래로 파가 나뉘더라도 그 근본과 연원을 확인할 근거가 있고, 백 대가 지나 멀어지더라도 소목昭穆(종묘나 사당에 조상의 신주를 모시는 차례)의 차례가 질서 있게 된다. 족보를 한번 펼쳐 보기만 해도 효도하고 우애하는 마음이 저절로 우러나게 되는 것이다.

우리 오씨는 나주에서 일어나 신라에서 고려에 이르기까지 천여 년을 이어왔다. 벼슬한 선조들의 명성이 빛나 나라의 역사와 야사에 뚜렷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세대가 오래되어 선대의 계통에 관한 자료가 흩어져 없어지고 이를 증명할 문헌마저 남아 있지 않으니, 어찌 후손들에게 지극히 안타까운 일이 아니겠는가?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네 분이 잇달아 조정에서 공훈을 세웠으며, 두 한림翰林이 이름을 떨쳐 나라의 뛰어난 인재가 되었다. 칠송공七松公의 고상하고 맑은 절개와 도암공韜菴公의 사학邪學(조선시대에, 주자학에 반대하거나 위배되는 학문)을 물리치고 정학正學을 지킨 행적은 한 고을의 모범이 되기에 충분하였다.

그 뒤로도 대대로 효도와 우애의 가풍을 지켜왔고 학문으로 유림의 종장宗匠을 이어왔으니, 이러한 사실은 옛 족보에 자세히 실려 있다.

족보는 모두 세 차례 중수하였다. 최초는 정묘보丁卯譜(1747년)였고, 그 뒤 족조 대사간공大司諫公(14世 정원鼎源, 1741-1810, 명곡공 5세손)과 그 아우 참판공參判公이 교정하여 판각ㆍ간행하였으니 이것이 바로 경오보庚午譜(1810년) 이다.

정미파보丁未派譜(1847년)의 경우에는 여러 파를 널리 수록하지 못하고 후산后山 한 파(명곡공파)만을 수록하였으므로 종중에서 이를 문제로 여겼다.

지난 정사년丁巳年(1857년)에 새 족보를 간행하자는 논의가 일어나 족형 임이재공臨履齋公 태규泰圭(17世, 1795-1866, 도림공 7세손)가 처음부터 끝까지 그 일을 주관하였다. 그 일을 맡아 추진한 지 4년에 이르러 초보草譜가 완성되었고, 재물을 모으고 장인을 구하여 이미 본격적인 간행 작업에 들어가려는 단계에 이르렀다.

그러나 일이 거의 끝나갈 무렵 의견이 서로 갈라져 중도에서 그치고 말았다. 우리 종문의 불행이 이보다 더 심할 수 있겠는가!

이제 정사년丁巳年(1857년)으로부터 다시 40년이 지났다. 당시의 여러 부형(숙부, 형님)들은 거의 모두 세상을 떠났고, 그 뒤에 태어난 이들도 이미 자식을 낳고 손자를 두기에 이르렀다.

만일 지금이라도 선대의 뜻을 이어 이 일을 완성할 방도를 마련하지 않는다면 세대는 더욱 멀어지고, 흩어진 자료와 종족을 거두어 모으기는 더욱 어려워질 것이다. 불초한 내가 족보 편찬을 이토록 서두르는 까닭이 바로 여기에 있다.

아! 선대의 부형들께서 미처 이루지 못하신 일인데, 불초한 나는 그분들을 위해 제대로 힘을 보탠 일조차 없었으니, 돌아보건대 어찌 이 큰일을 맡아 끝내 성취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것은 나 한 사람의 사사로운 뜻이 아니다. 곧 여러 종친 모두의 뜻이다. 여러 종친의 마음을 나의 마음으로 삼아 이 일을 발의하는 것이니, 어찌 크게 옳지 못할 일이 있겠는가?

이에 족제 윤규允圭(1828-1900, 명곡공 8세손), 사규士圭(1828-1901, 석문공 7세손)와 함께 의논하고 힘을 합쳐 이 뜻을 온 문중에 두루 알렸다. 이어 예전에 편찬하다 중단하여 보관해 두었던 족보를 가져다가 이전의 문서와 계보를 거슬러 조사하였다.

이미 간행되어 있는 선대의 계통은 다시 논할 필요가 없었다. 다만 그 가운데 빠진 장이나 누락된 쪽이 있고, 연기에 그을리거나 좀이 먹어 훼손된 곳은 형편에 따라 보수하였다.

그리고 아직 기록되지 않은 후손들은 단자(單子)를 거두어 수록하고, 출생과 사망의 연월일 및 혼인 관계와 그 내력을 이어서 주석으로 달아 완성하였다.

새로운 내용을 옛 족보에 덧붙였으므로 책의 체제가 서로 완전히 맞지 않는 점은 피할 수 없었지만, 그래도 선대의 뜻을 이어 후세를 열어주고 선인들의 뜻과 사업을 잃지 않게 하는 일은 될 수 있을 것이다.

아! 정사년에 족보 편찬이 중단되었을 당시 오늘날 다시 완성하게 될 것을 미리 헤아렸던 것은 아닐 것이다. 그런데 오늘날 뒤이어 완성하면서 반드시 정사년丁巳年(1857년)에 마련했던 족보를 바탕으로 삼게 되었으니, 그 일이 본래 훗날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오늘을 기다린 셈이 되었다. 이것이 어찌 우리 종문의 다행이 아니겠는가?

불초한 내가 이 일에서 더욱 깊은 감회를 느끼는 것이 있다. 옛날 우리 문중이 번성하였을 때에는 충성과 효도, 공훈과 업적, 경학과 문장이 크게 빛나 남쪽 지방의 명문가가 되었다.

그런데 오늘날에 이르러 쇠퇴하여 떨치지 못하게 된 것은 하늘의 운수라 할 수 있지만, 종족이 서로 멀리 떨어져 소식조차 알지 못하게 된 것은 사람에게 달린 일이다.

하늘에 달린 일은 내가 어찌할 수 없지만, 사람에게 달린 일이라면 우리는 그래도 힘써 노력하여 선조들의 경지에 이르기를 바랄 수 있다.

바라건대 우리 종친들이 자신의 근본이 어디에서 비롯되었는지를 생각하고 저마다 화목과 돈독한 우애에 힘쓴다면, 오늘날 쇠퇴하여 떨치지 못하는 형편이 훗날 크게 번창하는 시초가 되지 않으리라고 어찌 알겠는가?

더구나 우리 조상께서 대대로 경사를 쌓고 어진 덕을 거듭하여 오셨으니, 반드시 다시 일어나 떨칠 이치가 있을 것이다. 이에 삼가 족보를 편찬하고 그날을 기다린다.

임진년(1892년) 8월 상순 후손 승규升圭가 삼가 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