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1747년 정묘보 서문(13世 시정 時鼎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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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묘보 서문 丁卯譜序文
[註] <정묘보 서문>은 나주오씨 최초 족보(1747년 발행 정묘보)에 실린 내용으로, 13世 시정時鼎(죽헌공, 1683-1755, 도림공 증손) 선조께서 작성하신 글입니다. 1981년 발행 신유보 43-44쪽에 실려 있는 한문 원문에 표점을 하여 알기 쉬운 현대어 국역문을 실었으며, 표점 원문은 국역문 뒤에 실었습니다.
[국역문]
무릇 집안에 족보가 있는 까닭은 하나의 근원인 뿌리를 거슬러 올라가 찾는 것이고, 구족九族(고조ㆍ증조ㆍ조부ㆍ부친ㆍ자기ㆍ아들ㆍ손자ㆍ증손ㆍ현손까지의 동종 친족을 통틀어 이르는 말)의 친족관계에 있어서 차례를 매기기 위함이다. 백 세百世까지 멀어진 자손들을 한 책에 함께 싣는 것은, 마치 나무의 천千 가지 만萬 줄기가 제각기 나뉘어 뻗어나가 무성해 지지만, 그 근본은 하나의 뿌리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이다.
위로는 선조의 계통을 잇고, 아래로는 후손에게 대를 이어 나갑니다. 세대가 아득히 멀어도 그 근본을 거슬러 올라가면, 어버이에 대한 효도와 동기同氣(형제자매)에 대한 우애하는 마음이 절로 생겨나고, 또한 후손들이 서로 멀어졌다 하더라도 차례를 밝혀놓으면 돈독하고 화목하게 지내려는 정이 자연스럽게 일어납니다. 이처럼 족보가 인간사회에 미치는 영향은 참으로 크다고 할 것이다.
그러므로 예나 지금이나 족보를 보배처럼 소중히 여기고, 대대로 지켜왔으며, 앞사람의 뒤를 이어 옛것을 보완하고 새롭게 하여 그 전승傳承을 오래도록 보존하고자 했던 것이다.
아아! 우리 문중의 족보가 일가 집의 화재를 입은 뒤에, 방조旁祖이신 찬성공贊成公(7世 겸謙, 금양군, 1496-1582)께서 흩어진 자료와 훼손된 기록을 수습하여 대략 수정ㆍ편집하였고, 칠송공七松公(7世 인訒, 1507-1559)께서 이어받아서 편찬을 완성하였으나, 정유재란(1597)으로 또다시 보존하지 못하게 되었다.
명곡공明谷公(9世 희도希道, 1583-1623)께서 족보가 영원히 사라져 전해지지 못할까 염려하여 일찍이 이에 뜻을 두었으나, 문헌으로 증명할 자료가 없어서 겨우 중랑장공中郞將公(1世 언偃, 기세조起世祖) 이하의 세계世系만을 기록하였고, 그보다 윗대의 세수世數와 이름은 이미 고증할 길이 없었으며, 비위妣位(아내) 및 방계 친족도 자세히 알 수 없어 족보를 완성하지 못하였다.
그 뒤 태인 현감 도암공韜菴公(9世 희길希吉, 1556-1623)께서 그 뜻을 이어 수년간 공을 들여 비로소 초본을 완성하였다. 그 후 옥헌공玉軒公(11世 기석祺錫, 1651-1702, 명곡공 손자)께서 진사進士이신 족숙族叔 12世 대관大寬(1656-1708, 명곡공 증손)과 함께 그 초본을 바탕으로 번잡한 부분은 덜고 누락된 부분은 보충하여 후손들의 계통을 기록하고 여러 종친에게 전하였다. 또한 족조族祖이신 식음당息蔭堂(11世 현석玄錫, 1646-1708, 석문공 2子)과 그 아들 도사공都事公(12世 대준大濬, 1680-1733)께서 선조의 뜻을 이어받아 각별히 뜻을 두어 목판으로 간행하려고 힘썼으나 끝내 완성하지 못하였다.
임술년(1742) 봄에 여러 종친들이 용진사湧珍寺에 함께 증보ㆍ수정하여 인쇄ㆍ배포할 일을 의논하였고, 을축년(1745) 가을에는 여러 장로들께서 외람되게도 부족한 나를 추천하여 이 책임을 맡기셨다. 돌이켜보건대 저의 용렬庸劣(변변치 못함)하고 비루鄙陋(초라함)한 자질로는 진실로 감당할 바가 아니었다. 그러나 생각해보니, 옛 족보가 불탄 뒤 다시 편찬할 때에도 옛날에 들은 바를 많이 따랐으나 아직도 중랑장공(1世 언偃) 이상의 세계世系에 대해서는 상세히 알 수 없었다.
앞으로 세월이 더욱 멀어지고 오래 지나게 되면, 겨우 이루어진 이 초고마저 또한 어찌 반드시 전해진다고 장담할 수 있겠는가? 이에 감히 사양하지 못하고, 마침내 족형13世 시상時祥(1677-1759, 참판공 5세손)과 함께 옛 원고를 바탕으로 상의하고 각 파에서 제출한 단자單子를 거두어들여 추가로 기록하였다. 그리하여 2년이 지나 정묘년(1747)에 비로소 완성하여 인쇄하기에 이르렀다.
또한 오래된 옛 문적 가운데 여러 세대에 걸쳐 수집한 자료들 속에 근거로 삼을 만한 것이 있거나, 종친들 또한 그 들은 바를 적어 상자에 보관하여 훗날의 고증을 대비한 것들이 있었다. 비록 모두를 다 믿을 수는 없으나, 그렇다고 빠트려 기록하지 않은 것도 마땅치 않다고 생각하였다. 그래서 그것들을 책머리에 나열하여 후일 진위를 가려 참고할 자료로 삼고자 하였으니, 널리 들어 그 의심스러운 것을 바로잡고 널리 자료를 수집하여 그 빠진 부분을 보완하고, 계속 편집하여 영구히 전한다면, 이는 훗날의 여러 군자君子들에게 깊이 바라는 바이다.
후손 시정時鼎이 삼가 서문을 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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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標點 原文]
夫家之有譜,所以溯一源之本,序九族之親。百世之遠,幷載一書,如木之千枝萬條,各自分播暢達,而莫不本乎一根。
上以承統,下以繼緖。世代之玄遠而溯其本,則孝悌之心油然而生;後屬之疎遠而序以次,則敦睦之情渙然而發。是譜之關係於人大矣。
此古人之所以莫不寶重世守,步前足後,修舊而圖新,壽其傳而期無窮者也。
嗟乎!吾宗譜牒,被燼於同宗家回祿之後,旁祖贊成公掇拾斷爛,略加修輯,七松公繼而編成。及至丁酉兵燹,又不得保。明谷公懼其永泯而無傳,蓋嘗留意於是,而文獻無徵,僅錄中郞將公以下世系,而以上代數名諱, 己無可稽 ; 妣位及旁親, 莫之詳,而未成譜焉。
縣監韜菴公踵之,而積年用功,始成草本。其後玉軒公, 與進士族叔大寬, 就其本而刪煩補漏,載錄後承,謄傳諸宗。族祖息蔭堂曁其胤都事公大濬,克追先志,銳意入梓,而功未就。
壬戌春,諸宗齊會湧珍寺,議定添修印布之事。乙丑秋,諸長老猥推不佞,畀以是責。顧此庸陋,實非可堪。第念舊譜之被燒重輯也,多襲舊聞,而尙未能詳於中郞公以上世系。
自今以往,愈遠愈久,則僅成之草譜,又安保其必傳而不泯沒乎?
玆不敢辭,乃與族兄時祥,因其舊本而商確,收得各派單子而添錄。
越二年丁卯,始成開印。
而且其久遠文蹟之入於累代裒集中,或有可據者;同宗諸人, 亦或有仍其所聞, 而書藏篋笥, 以備後考者。雖不可盡信,或不宜闕錄。玆用拜列篇首,以爲參證之資。
若夫多聞以正其疑,廣取以補其闕,隨輯永傳,深有望於後來諸君子云爾。
後孫 時鼎 謹序。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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