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나주연혁기 (13世 시정 時鼎 작성)
view : 42
나주 연혁기 羅州沿革記
[註] 나주는 조선시대 호남 지방을 대표하는 거점이자 행정 중심지(나주목)였습니다. <나주연혁기>는 나주오씨 최초 족보(1747년 발행 정묘보)에 실린 내용으로, 정묘보 서문을 쓰고 정묘보 발행을 주관한 13世 시정時鼎(죽헌공, 1683-1755) 선조께서 동국여지승람, 금성읍지, 나주목읍지, 동국통감 같은 역사서 등을 교차 검증하여 요약 정리한 기록물입니다.
[번역문]
나주羅州는 본래 백제의 발라군發羅郡(일설에는 통의通義라고도 한다)이었는데, 신라가 금산군錦山郡(일설에는 금성錦城이라고도 한다)으로 고쳤다.
『동국통감東國通鑑』을 살펴보면, 당나라 중종 사성嗣聖 3년이자 신라 신문왕 6년인 병술년(686)에 백제 땅에 주군州郡을 설치하면서 발라주를 군郡으로 고쳤다고 한다. 이때는 백제가 멸망한 지 겨우 27년이 된 해였다. 사성 병술년(686)부터 천복天復(당나라 소정 연호) 계해년(신라 효공왕 7년, 903)까지는 곧 218년(햇수 기준)이 된다.
신라 말기에 견훤甄萱이 후백제라 자칭하고 그 땅을 모두 차지하였다. 얼마 지나지 않아 군郡 사람들이 후고구려 왕 궁예弓裔에게 귀부하였다. 궁예가 고려 태조(왕건)를 정기태감精騎太監으로 삼아 수군을 거느리고 이곳을 공격하여 빼앗은 뒤에, 지금의 이름(나주)으로 고쳤다.
『동국통감』을 살펴보면, 당나라 소종 천복 3년이자 신라 효공왕 7년, 견훤 12년, 궁예 3년인 계해년(903)에 고려 태조가 공격해 취하고 지금의 이름(나주)으로 고쳤다고 한다. 이 천복 계해년(903)부터 숭정崇禎(명나라 마지막 황제인 의종의 연호) 기원 후 두 번째 계미년(조선 숙종 29년, 1703)에 이르기까지는 곧 801년(햇수 기준)이다.
(고려) 성종 14년(곧 송나라 태종 지도至道 원년이자 거란 통화統和 13년인 을미년(995))에 절도사節度使를 두고 진해군鎭海軍이라 불렀으며, 해양도海陽道에 예속시켰다. (이때 성종은 나주ㆍ광주ㆍ정주(영광)ㆍ승주ㆍ패주(보성)ㆍ담주(담양)ㆍ낭주(영암) 등의 주현을 해양도로 삼았다.)
(고려) 현종 원년(곧 송나라 진종 대중상부大中祥符(연호) 3년이자 거란 통화 28년인 경술년(1010))에 임금이 거란을 피해 남쪽으로 피난을 오면서 이 고을 나주에 이르러 열흘 동안 머물렀다. 거란 군사가 패배하여 물러가자 왕이 마침내 도읍으로 돌아갔다.
현종 9년(곧 송나라 진종 천희天禧 2년이자 거란 개태開泰 7년인 무오년(1018))에 나주목羅州牧으로 승격되었고, 본조(조선조)에서도 이를 그대로 따랐다.
------------------------------------------------
[원문(표점)]
羅州, 本百濟發羅郡(一云通義), 新羅改錦山郡(一云錦城).
按《東國通鑑》, 唐中宗嗣聖三年, 新羅神文王六年丙戌, 置州郡於百濟地, 以發羅州爲郡. 時百濟之亡纔二十七年. 自嗣聖丙戌, 至天復癸亥, 卽二百十八年.
羅季, 甄萱稱後百濟, 盡有其地. 未幾, 郡人附于後高麗王弓裔. 弓裔命高麗太祖爲精騎太監, 帥舟師攻取, 改今名.
按《東國通鑑》, 唐昭宗天復三年, 新羅孝恭王七年, 甄萱十二年, 弓裔三年癸亥, 麗朝攻取改名. 自天復癸亥, 至崇禎後再度癸未, 卽八百一年.
成宗十四年(卽宋太宗至道元年, 契丹統和十三年乙未), 置節度使, 號鎭海軍, 隷海陽道. (成宗以羅州·光州·靜州·昇州·貝州·潭州·朗州等州縣爲海陽道).
顯宗元年(卽宋眞宗大中祥符三年, 契丹統和二十八年庚戌), 避契丹南巡, 至州, 留旬日. 契丹師敗退, 王乃還都.
九年(卽宋眞宗天禧二年, 契丹開泰七年戊午), 陞爲牧, 本朝因之.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