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헌] 오씨래동문적기 (13世 시정 時鼎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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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씨래동문적기吳氏來東文蹟記
(오씨가 동방으로 들어온 기록)
[註] <오씨래동문적기>는 나주오씨 최초 족보(1747년 발행 정묘보) 서문 다음에 실린 내용으로, 정묘보 서문을 쓰고 정묘보 발행을 주관한 13世 시정時鼎(죽헌공, 1683-1755) 선조께서 '오윤보의 지석기', '보성오씨 족보 서문', '함양오씨 오상옥 족보 서문', '오씨 유전 문자' 등을 비교설명•평가하면서, '광신지석기'의 여러 의문점을 설명하고, 족제 세주世冑(1700-1732, 명곡공 현손)의 기록을 소개하는 등 그 당시 오씨 문헌들을 살펴 볼 수 있는 역사적 기록물입니다.
[번역문]
삼가 살펴보건대, 오윤보吳潤寶가 얻은 지석 비문 기록(오윤보의 지석기, 1455년)과 함양咸陽 오상옥吳相玉의 족보 서문(1689년), 보성오씨寶城吳氏 족보 서문(1766년), 그 밖의 여러 오씨吳氏 집안에서 전해 내려오는 기록들을 살펴보면,
모두가 “오기吳起의 후손인 오첨吳瞻이 배를 타고 동쪽으로 건너왔다.”라고 하였으니, 이것이 여러 오씨吳氏의 시원이 되었다는 내용이다. 비록 문장마다 자세히 다룸에 차이는 있으나, 그 근원은 <오윤보의 지석기>에 있다.
[지석기 기록내용, 지석 발견 경위]
그 <오윤보의 지석기>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동방東方에는 본래 오씨吳氏 성을 가진 이가 없었다. 중원中原 사람 오첨吳瞻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왔는데, 세대가 아득히 멀어 그 연유를 자세히 알지 못한다.
흥양興陽 땅에 살고 있는 의금義妗이라 불리는 한 여인이 집 뒤에서 광주리(筐)를 들고 밤을 줍다가 발을 헛디뎌 넘어지면서 땅속 구덩이 속에서 돌 하나를 얻었는데, 돌 모양이 반듯하고 아름다워 집으로 가져와 화분(盆) 받침으로 사용한 지 여러 해가 지났다. 그 뒤 집안에 잦은 재앙이 일어나서, 그 돌을 허물어진 담장 옆에 버려두었는데, 비바람에 씻기고 닳았음에도 그 글자가 또렷이 보였다.”
[지석기 기록 소개 / 오씨 동래 경위]
그 지석에 기록된 내용은 다음과 같다.
“오씨吳氏는 본래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의 후손이다. 오랜 세대를 거쳐 오기吳起의 손자 오첨吳瞻에 이르렀다. 오첨의 아들인 오익吳翊이 웅대한 뜻으로 인해 죄를 지어서 도망하게 되었고 배를 타고 바다를 떠돌다 풍랑에 휩쓸려 해남海南 땅에 이르게 되었다.
첨사僉使가 병졸과 함께 오익을 붙잡아 나라에 호송하려고 하였으나, 오익이 사실대로 말하고 재물을 줬다. 첨사가 그의 사정을 가엾게 여기고 뇌물을 좋아하며 결박을 풀어주고 예로써 대하였다. 이일이 조정에 보고되었고, 첨사와 오익이 함께 잡혀 와서 심문을 당하였다. 오익이 사실대로 말하자, 조정에서는 첨사를 처형하고 오익을 가엾게 여겨 그를 사면하여 이 땅에서 살게 하였다.
그러나 오익은 다른 나라 사람이라 아내를 맞이할 수가 없어 근심하던 중, 영남嶺南 함양咸陽 땅에 한 여자가 있었는데 아주 추하였다. 오익이 그 여자를 아내로 맞이하니, 아들 셋을 낳아 각각 해주군海州君, 함양군咸陽君, 고흥군高興君이 되었다.”
이에 미루어보건대, 우리 오씨吳氏는 본래 한 뿌리에서 나왔으니, 본래부터 성씨가 다른 것이 아니었다.
아아! 만약 이 지석誌石이 없었다면, 어찌 우리가 전욱고양씨顓頊高陽氏의 후손임을 알 수 있었겠는가? 어찌 세 지역(함양, 해주, 고흥)의 오씨가 모두 한 뿌리임을 알 수 있었겠는가?
그 후손으로서 이 족보를 보는 자라면, 어찌 감격하지 않고 그 뜻을 마음에 새기지 않을 수 있겠는가?
[동복오씨 시조 오녕과 아들 오중환, 손자 오대승 소개]
고려 때 오녕吳寧(동복오씨 시조)이 동복현同福縣에서 태어나, 그가 현의 남쪽에 석등을 세우고 48일 밤낮으로 향을 피워 하늘에 빌어 아들 오중환吳仲環을 낳았고 그가 무과에 급제하였다. 또 오중환은 아들 오대승吳大陞을 낳았는데, 오대승은 고려에서 벼슬하여 지위가 정승政丞에 이르렀고, 시호는 문헌공文獻公이라 했다.
[지석기 기록 소개 / 오씨 성의 기원]
그 <오윤보의 지석기>에는 또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월왕越王 구천句踐이 오吳나라를 멸하자, 오왕吳王 부차夫差의 아들 오이의吳夷義가 오하에 봉해져 두 고을을 식읍으로 하여 선조 제사를 지냈다. 오이의의 아들 오루양吳鏤羊이 위衛나라에 들어가자, 위후衛候가 ‘너는 오吳나라 땅에서 왔으니 성을 오씨吳氏라고 하라’고 하였다.” 그 기록이 《춘추절서春秋絶書》 편에 있다고 한다.
[864년 오사충吳思忠의 “광신지석기廣信誌石記” 기록을, 1455년 오윤보吳潤寶가 듣고 기록하다]
“오기吳起는 오루양吳鏤羊의 후손이고, 오첨吳瞻은 오기의 후손이다. 오첨의 아들 오익吳翊은 중국의 대장군이었으나, 호걸다운 기질로 인해 죄를 지어 도망하여 배를 타고 동방으로 왔다.
왕명으로 함양이씨咸陽李氏의 딸을 아내로 맞이하여 오수권吳守權이라는 아들 하나를 낳았다.
오수권은 세 아들을 두었는데, 오현좌吳賢佐는 비안군庇安君, 오현보吳賢輔는 해주군海州君, 오현필吳賢弼은 화순군和順君이라 했다.
오현필의 아들 오광신吳廣信은 절제사節制使에 올랐다. 오광신의 아들 오사충吳思忠은 후세 사람들이 선대의 계통을 알지 못하여 혼인 관계를 잘못 맺을까 염려하여, 묘지석에 이를 기록하여 오광신의 무덤에 순장殉葬하여 선계先系의 분파를 밝혔으니, 자손들에게 어찌 일만분의 일이라도 다행스럽지 않겠는가!
함통咸通 5년(864, 신라 경문왕 4년) 2월에 오사충吳思忠이 기록하였고, 경태景泰 6년(1455년, 조선 세조 1년), 오윤보吳潤寶가 처음 듣고 이를 기록하였다.”
[4종의 기록에 대한 비교 설명ㆍ평가]
그러나 그 가운데에는 서로 어긋나고 의심스러운 점도 있다.
<오윤보의 지석기>와 <보성오씨 족보 서문>에서는, 모두 “오첨의 아들 오익이 처음으로 동쪽에 와서 아들 오수권을 낳았고, 오수권이 세 아들을 낳아 모두 군君에 봉해졌다.”고 하였다.
그러나 오씨 가문에서 전해 내려오는 기록에서는, “오첨이 직접 동쪽으로 와서 세 아들을 낳았다.”고 하였고,
<함양 오상옥의 족보 서문>에서도, “오첨이 동쪽으로 왔다.”고 하였다.
그렇다면 오첨의 아들이 오익과 오익의 아들이 오수권이라는 기록은 어찌하여 어떤 기록에는 있고 어떤 기록에는 없는가? 혹시 저 기록은 군더더기 글이 추가된 것이 아닐까? 아니면 이 기록에 빠진 부분이 있는 것일까?
뿐만 아니라, <오윤보의 지석기>와 <보성오씨 족보 서문>에서는 두 차례나 [지석기誌石記]를 기록하였다.
처음 기록에는 “오익吳翊이 세 아들을 두었으니, 한 사람은 함양군咸陽君, 한 사람은 해주군海州君, 한 사람은 고흥군高興君이 되었다. 이어서 고흥군高興君이 흥양군興陽君으로 바뀌었다.“고 하였다.
<보성오씨 족보 서문> 뒤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오익이 오수권을 낳고, 오수권이 세 아들을 낳았으니, 오현보는 해주군, 오현좌는 비안군, 오현필은 화순군이다.”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이는 아마도 부자父子가 대를 이어 봉작封爵을 계승한 것이지만, ‘고흥과 흥양’은 지명地名이 서로 바뀐 것이고, ‘비안과 화순’은 작호爵號를 고친 것이 아닌가 한다.
[각 기록에서 오익吳翊의 세계世系 비교]
오익吳翊의 세계世系에 이르러 보면, <오윤보의 지석기> 기록과 <보성오씨 족보 서문>에서는 모두 “오첨吳瞻의 아들이 오익吳翊”이라고 기록하였으나, 오직 <함양 오상옥의 족보 서문>에서는 “오첨吳瞻의 아들이 오응吳膺”이라고 기록하고, “오익吳翊은 오첨의 17대손代孫”이라고 하였다. 그렇다면 어찌 이처럼 대수代數가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오익과 오수권의 선후 기록]
또 그 아래 기록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오희吳曦의 아들 오익吳翊이 오연총吳延寵에게로 출계하였고, 오익의 아들은 오경吳璟이고, 오경의 아들은 오등란吳登蘭이며, 오등란의 아들은 함양군咸陽君 오수권吳守權”이라고 하였다.
오익과 오수권의 선후先後가 어찌하여 이처럼 서로 차이가 있단 말인가? 아마도 옮겨쓸 때 착오가 생긴 것이 아닐까? 어느 기록이 옳고 그른지는 아직은 모두 알 수 없다.
[전해 내려오는 기록 중 의심스러운 글 기록]
이러한 논쟁은 본래 아무런 실익이 없는 변론이기 때문에 이미 전해 내려오는 기록 가운데 의문점이 있는 글을 실었으나, 여러 내용을 모두 다 옮겨 적지는 못했다. 그러나 이글들을 없애 버린다면 증거로 삼아 살필만한 것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므로 의심이 나는 단서들을 모아서 훗날 여러 자료들과 신중하게 검토할 수 있는 판단의 근거로 삼고자 하였다.
[장화왕후와 태조의 만남, 무武 출생, 차비 책봉, 혜종 즉위]
또 《동사東史》(고려사)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고려 태조 4년(辛巳, 921년) 12월에 아들 ‘무武’를 책봉하여 정윤正胤으로 삼았다. 주석에는, ”처음에 왕(태조 왕건)이 수군을 거느리고 나주羅州에 나가 주둔하였을 때, 목포木浦에 사는 오씨吳氏 여인을 만나 아들 무武를 낳았다(912년).
태조는 아들 무武가 왕위를 이을 만한 덕이 있음을 알고 그를 후사後嗣로 삼고자 하였다. 이에 옛 궤짝에 자황포柘黃袍(주황색 비단)를 담아 장화왕후 오씨에게 하사하였다. 장화왕후 오씨가 이것을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에게 보이니, 박술희가 태조의 뜻임을 헤아려 알고 무武를 정윤으로 세우길 요청하였다. 정윤은 곧 태자(왕위를 이을 임금의 아들)이다. 태조 26년 계묘癸卯(943년) 5월에 정윤 무武가 즉위하니 이가 바로 혜종 의공왕이다.”라고 하였다.
또 <함양 오상옥의 족보 서문>에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태조가 나주에 주둔할 때 흥룡리에 사는 오씨의 딸을 아내로 맞아 혜종을 낳았고, 오씨를 차비次妃로 책봉하였으며, 혜종이 즉위하자 모후母后(장화왕후)의 삼 형제를 천령백天嶺伯, 금성백錦城伯, 수양백首陽伯으로 봉하였다.”고 하였다.
이로 보아 《고려사》와 이 <함양 오상옥의 족보 서문>이 어느 정도 서로 일치함을 알 수 있다.
[족제 오세주吳世冑의 기록 소개 / 보성오씨 족보 관련]
또한 족제族弟 오세주吳世胄(1700-1732, 명곡공의 현손) 기록에 따르면, “기유년己酉年(1929년) 여름에, 충청도 문의文義 삼기리三歧里에 사는 오영기吳英基가 문의현文義縣 덕화면德化面에 사는 오정기吳鼎基의 집안에서 대대로 전해 내려오는 《보성오씨 족보》가 있었는데, 그 족보 안에는 휘諱가 숙규淑珪, 숙환淑環인 형제가 있었고, 또 중랑장中郎將의 휘諱가 있었다.”라고 하였다.
[4종의 기록에 대한 평가]
이 모든 것을 하나로 모아 살펴보면, 동방東方 오씨들이 비록 본관本貫은 서로 다르더라도, 시조는 한 사람이라는 설이 망령된 이야기는 아닌 것 같다.
옛 문헌을 멀리서 살펴보고, 오늘날의 여러 족보를 널리 참고한다면, 선대에서 누락된 계보를 어느 정도는 이어받을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사는 곳이 아주 외지고 누추한 곳이고, 보고 듣는 것이 적어서, 설령 족보를 수정하고 보완한다고 하더라도 아직은 선대의 계통을 잇는데 부족한 점이 많으니, 어찌 기뻐할 수만 있겠는가?
[후손들에 대한 당부 말씀(1)]
삼가 바라는 바는, 모든 종친과 후손들은 작은 성취에 만족하지 말고 각자 스스로를 경계하여 힘쓰기를 바란다.
혹시 어디에서 오씨吳氏 사람을 만나거든 그들의 족보를 물어 사실을 확인하고, 혹시 문의文義 지방을 지나거든 그 지역에 사는 오씨 집안을 찾아가 물어서, 선대에서 누락된 계통을 잇고 족보를 고쳐서 바로잡아 완전하게 만든다면, 조상을 빛내고 후손에게 유익을 주는 공을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후손들에 대한 당부 말씀(2)]
이상은 옛 문헌을 보고 들은 바에 따라 감히 나의 의견을 덧붙여, 전해 내려오는 우리 오씨의 기록이 참으로 그러한가의 의문점을 전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후손들이 공ㆍ사公私의 문헌을 더욱더 고증하여, 위로는 조상들의 누락된 계통을 잇고, 아래로는 자손들의 후생들을 기록해 나감으로써 새로운 족보를 계속 이어 나가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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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註] 1. 이 글은 정묘보 서문 다음에 실려있는 기록으로, 정묘보 서문을 쓰고 정묘보 발행을 주관한 죽헌공竹軒公 시정時鼎 선조님의 글이다. 시정 선조님은 이 글에서 오윤보의 지석기, 보성오씨 족보 서문, 함양오씨 오상옥 족보 서문, 오씨 유전 문자 등을 비교설명ㆍ평가하면서, 광신 지석기의 여러 가지 의문점을 설명하고, 끝으로 족제 오세주吳世冑(1700-1732, 명곡공의 현손) 선조님의 기록을 소개하고, 후손들에게 당부의 말씀도 자상하게 하였다.
2. 정묘보 범례 제25항에서도, “오씨가 동쪽으로 온 것을 기록한 문적文籍 가운데 네 종류(오윤보의 지석기, 보성오씨 족보 서문, 함양 오상옥 족보 서문, 오씨 유전 문자)를 보게 되었으나, 모두 그 진위를 알지 못하겠고, 또한 우리 종중의 세계世系로 전해지는 것도 아니다. 그러므로 그 요점을 가려서, 곧 오윤보吳潤寶의 지석기誌石記와 오상옥吳相玉의 족보 서문序文의 말을 베껴 책 권두에 기록하여, 훗날의 고증에 대비하고자 한다. (吳氏東來, 文籍得見四樣, 而皆未知其眞的, 亦非吾宗世系之傳。故撮其要-吳潤寶誌石記及吳相玉序文語, 謄書卷首, 以備後考。)”라고 쓰셨다.
吳氏來東文蹟記 원문(표점)
謹按: 吳潤寶所得誌石記, 及咸陽吳相玉族譜序、寶城吳氏族譜序, 及他吳氏流傳文子,
則皆曰 「吳起之後, 瞻乘舟來東」, 是爲諸吳之始。言雖有詳畧之殊, 事則本潤寶之誌。
其誌曰:「東方本無吳姓人。中原吳瞻, 乘舟浮海而來, 世代遙遠, 不知所由。
興陽居義今稱名女人, 於其家後, 挾筐拾栗, 跌足顚地, 得一石於坑坎之。其狀甚正, 可愛掬取, 以爲捀盆者, 有年矣。
厥後家多災變. 棄之於頹垣之所, 爲風雨所磷, 字額分明, 歷歷可見。」
其誌所記曰:「吳氏本顓頊高陽氏之裔也。歷累世, 至吳起之孫瞻。
瞻之子翊, 以雄豪之志得罪亡命, 乘舟浮海, 爲風所飄, 至于海南之地。
僉使與兵執之, 將獻于國。吳公以實告之, 又以貨遺之。
僉使憐其情而喜其賂, 解縛, 侍之以禮, 事聞朝廷, 僉使及吳公一時被執, 窮問其所由라。
吳公以實告之。朝廷誅僉使, 憐吳公, 赦居本朝。
吳公以他邦之人, 不得娶妻. 因於遑遑。嶺南咸陽地, 有一女, 色貌甚惡. 吳公求以娶之, 一爲海州君, 一爲咸陽君, 一爲高興君。」
以此觀之, 惟我吳姓, 本同一根, 固無異姓矣。
嗚呼哀哉! 若非誌石, 熟知顓頊高陽氏之苗裔? 熟知三邑吳同一根也?
爲其後裔而覽此譜者, 寧不感於中而銘於心乎?
高麗時, 吳寧生於同福縣, 縣南作石燈四十八晝夜, 焚香告天,
登武科: 生仲環, 仕於高麗, 位至政丞, 諡文獻公。
其誌石記曰:「越王句踐滅吳, 夫差之子夷義封於吳下, 食二郡, 以祀其先。其君都吳。夷義之子鏤羊入衛,
衛侯曰: 「汝自吳地來。」 賜姓吳氏。
其事見於春秋絶書篇。吳公起, 鏤羊之後也。 吳公瞻, 起之後也。
瞻之子翊, 爲中國大將軍, 以雄豪之志, 得罪亡命, 乘舟來東。
以王命, 娶于咸陽李氏之女, 生一子守權。
守權生三子: 賢佐庇安君, 賢輔海州君, 賢弼和順君也。
其子廣信, 官至節制使。
子思忠, 預憂後世未知先世分派, 妄以續婚. 故記于誌石, 殉葬于廣信之墓, 以明先世分派。
爲子孫者, 豈非萬一之幸也!
咸通五年二月日, 吳思忠誌。景泰六年, 吳潤寶始得聞, 以記云。」
而其中亦有相左可疑之端。吳潤寶誌石記及寶城吳氏族譜,
皆謂 吳瞻之子翊始來東方, 生子守權, 守權生三子而皆封君;
流傳文子則曰: 吳瞻來東生三子。
吳相玉序亦云: 吳瞻來東, 則瞻之子翊, 翊之子守權。
何以或書或不書? 無乃彼衍文乎? 抑或此有闕耶?
且夫吳潤寶所誌及寶城吳氏序中, 再錄誌石記,
而初則曰: 「吳翊生三子, 一爲咸陽君, 一爲海州君, 一爲高興君」 :
而高興君變爲興陽君。
於寶城吳氏之序後, 則曰: 翊生守權, 守權生三子. 賢輔海州君, 賢佐庇安君, 賢弼和順君。
則意者父子襲封, 而高興,興陽地名之相換也; 庇安,和順爵號之改易耶。
至於吳翊世系, 則潤寶所誌及寶城吳氏, 皆以瞻之子翊懸錄;
而獨於相玉譜, 瞻之子則以膺懸錄, 而翊之於瞻, 乃爲十七代孫.
則何其相越之遙也?
又其下云: 曦子翊出繼延寵, 翊子璟, 璟子登蘭, 登蘭子守權咸陽君。
翊與守權, 何其先後之相錯也? 無乃傳寫之誤耶?
彼此得失, 皆未可知也。
此固無益之辨. 然旣載傳疑之文, 而多不能盡錄, 則刪去文字, 無憑可考。
故撮其可疑之端, 以爲斟酌參考之地。
又按東史:「高麗太祖四年辛巳十二月, 冊子武爲正胤。
註曰:初, 王以水軍出鎭羅州也. 幸木浦居人吳氏女, 生子武。
知其有繼嗣之德, 欲爲嗣. 乃以古笥盛柘黃袍賜吳氏。
吳氏以示大匡朴述熙, 述熙揣知王意, 請立爲正胤。正胤卽太子也。
至二十六年癸卯五月, 正胤武卽位, 是爲惠宗義恭王。」
而吳相玉序亦云:「太祖留鎭羅州, 娶興龍吳氏女, 生惠宗, 冊(吳氏)爲次妃。
惠宗卽位, 封母后之三兄弟, 爲天嶺, 錦城, 首陽伯。」
則《麗史》與序文, 頗相合矣。
且見族弟世胄所記: 己酉夏, 忠淸道文義三歧里居吳英基,
歷傳文義縣德化面居吳鼎基家, 有寶城吳氏族譜。
譜中有諱淑珪, 淑環兄弟, 又有中郎將諱云。
合以觀之, 東方吳氏姓貫雖殊, 始祖惟一之說, 似非妄矣。
遠考古籍, 廣諮今譜, 則先代漏系, 庶可得承。
而所居僻陋, 聞見淺薄, 縱修譜牒, 而尙欠先代繼承, 可勝歡哉!
伏願諸宗若後昆, 毋安小成, 各自惕慮。
或逢吳姓人, 則問其譜而質之, 或過文義地, 則訪其居而叩之。
得承漏系, 改修完譜, 則光前裕後之功, 何可量也!
右古今文蹟, 隨所見聞, 竊附己意, 傳其然疑,
而恭侯後昆之更加考證於公私文籍,
上承祖先之漏系, 下錄子孫之後生者, 續成新譜焉。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