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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태인공 희길 소기 (9世 희길 希吉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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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인공 희길 소기 泰仁公希吉所記

 

[註] <태인공 희길소기>는 나주오씨 최초 족보(1747년 발행 정묘보)에 실린 내용으로, 9世 희길希吉(도암공, 1556-1623) 선조께서 1615년(광해군 7)경 자신이 족보를 편찬하게 된 경위와 오씨 가문의 내력을 설명한 중요한 기록입니다. 맨 뒤에 <<사료 해설>>을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번역문]

 

(1條) [유서遺書] : 서윤공(오원吳謜) 선조님의 서序에 대하여 생각하다.

내가 어렸을 때(당시 13살 정도) 서윤庶尹이셨던 조부(오원吳謜)께서 서울에 계신 이상貳相(1568년 의정부 좌찬성, 오겸吳謙) 형에게 보낸 서序의 대략을 본 적이 있는데, “오씨는 변한弁韓에서 처음 일어나 신라에서 크게 번성하였고, 고려 때에는 쇠퇴하였으나 조선에 와서 다시 흥하였다”라고 하였다.

이를 본다면, 오씨의 선조가 예로부터 신라 경순왕의 부마가 되었다고 전해지는 말이 더욱 믿을 만하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2條) [족보서族譜序] : 칠송공(오인吳訒) 선조님의 ‘입장족보立張族譜’를 참고하여 정책正冊을 완성하다.

만력 4년(1576) 병자년, 당시 내 나이는 스물한 살이었다. 나는 부친상을 당해 상중에 있었는데, 진사進士이셨던 칠송공(오인吳訒) 할아버지께서 일찍이 기록해 두신 입장족보立張族譜를 보게 되어서, 곧바로 베껴 기록해 두었다.

 

나는 이런 일을 그냥 지나치지 않는 성격이고, 또 잘 잊어버리는 버릇이 있어서, 사람들을 만나 일가임을 알게 되면 곧잘 물어서 기록해 두었다. 그렇게 한 조각 한 조각 모아 놓은 지가 벌써 여러 해가 되었다.

 

그런데 임진왜란(1592)과 정유재란(1597), 또 갑오년(1594)에는 집에 불이 나는 사고까지 겪었지만, 다행히 모아둔 가문의 소중한 기록들이 모두 불타지 않고 보존되었기에, 이를 바탕으로 만력 38년(1610) 경술년 정월, 한양의 객사에 머물며 마침내 초책草冊(처음으로 초안草案하여 기록한 문서)을 만들 수 있었다.

 

그 뒤 나는 평릉마관平陵馬官으로 강원도 삼척의 우정郵亭에 있으면서 정책正冊을 만들 생각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아직도 빠진 내용이 많아서 끝내 완성하지 못하였다. 생각해 보니, 사촌 아우인 중명仲明(희철希哲의 '字')이 이 일에 매우 밝았으므로, 더 넓게 수집하여 상세히 만들고자 하였다.

 

그런데 올해 여름(1615년 6월), 내가 태인 현감으로 있을 때 불미스러운 일로 인해 무함誣陷을 받게 되었고, 아들 이정以精 마저 억울하게 잡혀가 서울 감옥에 갇히게 되었다. 나 역시 이 사건으로 인해 현감 자리에서 파직(체직)되어 서울로 오게 되었다.

 

비록 중명仲明(희철希哲의 '字')이 정리한 자료는 아직 올라오지 않았지만, 내가 뜻밖의 재앙을 당한 것을 생각하니 장차 어떤 일이 생길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만력 43년(1615) 윤8월에 비로소 정책正冊을 완성하였다. 이것이 비록 초본으로 만들어진 것이지만, 전란 이후 병화로 인해 집집마다 소장하던 문헌들이 사라져 더 이상 고증할 방법이 없으니 한탄스럽기 그지없다.

 

살펴보건대, 오씨의 선조는 본래 나주 중흥리에서 일어나 신라에서 벼슬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나주는 곧 옛 변한弁韓의 땅이다. 그 뒤 진한辰韓으로 들어갔고, 후에는 백제 땅이 되었다가 다시 신라에 합해진 것이다.

 

오씨의 선조는 마침내 경순왕의 부마가 되었다. 그러나 이분은 분명 오씨 가문의 중간 세대(중엽)일 것인데, 그 가문이 처음 흥하게 된 이유와 대대로 전해 내려온 혈통의 맥락을 증명하여 고찰할 길이 없으니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아아! 무릇 사람이 태어나 살아가는 것은 마치 물에 근원(발원지)이 있고, 굽이굽이 뻗어가는 산맥에 줄기(맥락)가 있는 것과 같다. 비록 후손의 갈래는 천 갈래ㆍ만 갈래로 나뉘어도 근원을 따져 올라가면 모두 한 사람에게서 갈라져 나온 것이다. 한 사람에게서 형제가 갈라지고, 형제에게서 다시 사촌ㆍ육촌ㆍ팔촌으로 갈라진다. 친함이 다하면 정이 다하고, 상복을 벗으면 도인道人(남)이 된다.

 

이른바 도인이라는 사람은 기쁜 일이 있어도 축하하지 않고 슬픈 일이 있어도 조문하지 않는다. 만약 도인이 말한 대로 그 근원을 따져 본다면, 결국 (우리 모두는) 한 조상에서 갈라져 나온 사람들인데 어찌 남처럼 멀다고 할 수 있겠는가! 만약 (남과 다름없는) 도인처럼 행동하며 (친족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은 진실로 조상에게 죄를 짓는 사람이다.

 

금성군錦城君(오신중吳愼中) 이하로부터 (족보에) 이름을 적은 것은, 족보가 나로부터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선조를) 높이 받들고자 한 뜻에서 한 것으로, 미산眉山의 소씨蘇氏(소동파 가문) 족보 서문에서 나오는 문구를 인용한 것이다.

 

또 범문정공(범중엄范仲淹, 989-1052, 북송北宋의 정치가ㆍ학자)이 의전義田을 두어 친족의 혼인婚姻과 상사喪事에 차등을 두어 제도를 가다듬었으니, 이는 모두 후세에 본받을 만한 규범이다.

 

나의 어머니 박씨는 일가친척들에게 정이 매우 두터우셨다. 무릇 문중 사람이 상을 당했을 때 평소에 만나 본 적이 있는 분이라면 상복을 입어야 하는 친척(유복친)인지 아닌지(무복친)를 따지지 않고 반드시 소복을 입고 애도를 표하셨다. 비록 오륙십 촌의 먼 친척에게도 마찬가지였다. 세월이 오래되었다 하여 조문하지 않으면 반드시 뒤에 슬퍼하고 후회하게 되니, 이러한 점 또한 본받을 만하다.

 

평산 신씨平山申氏는 곧 우리 조부의 외가(증외가曾外家)이다. 청안 이씨淸安李氏는 곧 우리 부친의 외가(진외가珍外家)인데, 자세한 내력을 들을 길이 없어 여기에 충분히 기록하지 못하였다. 마침내 (자료를) 모아 정리하는 작업이 덕양 기씨德陽奇氏에 까지 이르렀는데, 덕양 기씨는 바로 내 처가이다. 이 내용 역시 여기에 함께 묶었으니 후세에 참고할 자료로 삼고자 한다.

 

(3條) [출처: 고려사高麗史]

오씨의 선조는 처음 신라에 벼슬하여 크게 번성하였다. 경순왕 때에 이르러서는 오씨 집안에서 부마를 배출하였다. 그러나 역사서에는 그 이름이 전하지 않는다.

 

고려 태조 왕건이 일어났을 때 경순왕은 항복을 청하였다. 이에 왕자가 울며 간언하였다. "마땅히 충신ㆍ의사들과 더불어 끝까지 힘을 다한 뒤에야 그만두어야 합니다." 천 년 사직을 어찌 쉽게 남에게 넘길 수 있겠느냐는 뜻이었다.

 

그러자 경순왕이 말하였다. "나라의 형세가 이미 위태롭다. 죄 없는 백성들로 하여금 피를 흘리게 하는 것은 내가 차마 하지 못하겠다."  왕자는 울며 하직하고 개골산으로 들어가 바위에 의지해 집을 짓고 삼베옷을 입고 나물을 먹으며 평생을 마쳤다. 그러나 그 왕자의 이름 또한 역사에 전하지 않는다.

 

(4條) [출처: 신동국여지승람新東國輿地勝覽]

고려 태조 왕건은 처음 궁예의 휘하에서 벼슬하였다. 수군 장군으로서 서해를 따라 나주에 주둔하였다. 당시 왕건의 첫 부인은 정주 유씨貞州柳氏였다(정주貞州는 지금의 강화江華에 속한 고을이다). 왕건이 목포에 이르러 바라보니 고을 위로 오색구름의 상서로운 기운이 떠 있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배를 타고 금강진錦江津에 이르렀다. 그때 흥룡동에서 베를 빨고 있던 여인을 만났는데, 그 여인이 곧 나주오씨였다. 왕건이 그녀를 맞아들였고, 그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이 곧 혜왕惠王이다. 혜왕이 세상을 떠나자 흥룡동에 전각을 세우고 진영眞影을 모셨다. 그 오씨가 곧 장화왕후莊和王后이며, 그의 아버지는 다련군多憐君, 어머니는 덕교德交이다. 또 흥룡동에 큰 절이 세워졌다고 한다.

 

(5條) [2세 예빈시정공(오계진吳季眞)의 기록에 대하여]

중랑장中郎將(오언吳偃)의 아들 계진季眞은 예빈시정禮賓寺正인데, 옛 족보에는 낭장郎將의 직함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금양군錦陽君(오겸吳謙)의 글에는 그러한 내용이 없으므로 지금은 이를 따랐다.

 

 오른쪽(이상) 5개 조는 태인공泰仁公 희길이 기록한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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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표점)]

 

(1條) [遺書]

余少時, 得見庶尹祖送二相兄于京洛序略曰: 「吳氏始興於弁韓, 極盛於新羅, 中衰於高麗, 復興於我朝云云。」以此觀之, 則吳氏先爲敬順王駙馬之言, 益驗矣。

 

(2條) [族譜序]

余於萬曆四年丙子。余年二十一歲矣。余方在父喪中, 得見進士訒祖所嘗錄立張族譜者, 輒取傳謄。

且余性於此等事不爲放過, 又自謂有善忘之性。見人有族分, 則輒問而記之。

片片聚之, 積有年紀。

適壬辰兵火及丁酉重亂, 甲午家火, 幸幷保全。萬曆三十八年庚戌正月日, 在漢陽寓舍, 始上草冊。

其後余以平陵馬官在江原三陟之郵亭, 非不欲謄寫正冊, 猶多有闕漏處, 終未之也。顧惟從父弟仲明(希哲字), 素詳於此事, 欲更加聞見, 致詳矣。

今年夏, 余以泰仁倅, 爲不肖人所誣陷, 子以精至拿囚京獄。余亦以此遞來京洛。

仲明之錄雖未上來, 而念余遭厄非常, 前頭人事未可預料。今萬曆四十三年閏八月日, 始謄正冊。此雖草就, 而亂後兵火所蕩, 凡人家藏一切無傳。無由考得歎如之何哉。

抑嘗惟吳氏先本起羅州中興里, 仕於新羅云。羅州, 即弁韓地。而入于辰韓, 後爲百濟地, 而合于新羅。

吳氏先至爲金傅王駙馬。金傅王, 即新羅敬順王也。此必吳氏中葉則其始興之由, 及傳來之脈, 無憑可考, 尤可歎也。

嗚呼! 凡人之生, 猶水之有源, 委蛇山之有條理。其終之枝派, 雖千百不同, 而原其本, 則實自一人而分來矣。自一人而分兄弟, 自兄弟而分四寸六寸八寸, 至於親盡情盡, 服盡爲道人。

夫所謂道人云者, 以喜不慶, 憂不吊。如道人云而顧其原, 則自一人而分, 豈遠乎云哉。苟以如道人而薄乎云者, 誠祖先之罪人也。

自錦城君以下, 以諱書之者, 譜自吾發。蓋有尊之之意, 以取眉山蘇氏譜序中語也。

范文正公置義田, 婚喪有等, 皆可法也。

余母朴氏, 篤厚親族。凡族人之死平日有嘗見面之分, 則不問有服無服, 必行素, 雖五六十猶然。年深坲爲行素, 必致傷嗟不巳。此亦可法矣。

其平山申氏, 即余祖父外族也。淸安李氏, 即余父外族。而無由聞見未及。竟聚至德陽奇氏, 乃余之妻族也。亦并附于此, 以爲後考焉。

 

(3條) [出處: 高麗史]

吳氏先仕新羅, 赫然爲盛。至敬順王, 以吳氏爲駙馬。史失其名。

當高麗太祖王建起, 敬順王請降。王子泣諫曰:「當與忠臣義士, 力盡而後已。」豈宜以一千年社稷, 輕易與人乎。

王曰:「孤危若此, 使無辜人肝腦塗地。吾所不忍。」王子哭辭入于皆骨山, 倚巖爲屋, 麻衣草食, 以終其身。史失其名。

 

(4條) [出處: 新東國輿地勝覽]

高麗太祖王建初仕於弓裔之朝。以水軍將軍, 由西海留鎭羅州, 而王建初室貞州柳氏(貞州, 江華屬邑)。 王建到木浦, 望見州上有五色雲氣, 由船至錦江津。與龍洞有女浣布。卽羅州吳氏也。王建召幸之, 生子卽惠王也。惠王薨, 建殿于興龍洞。有眞像安安于殿。吳氏卽莊和王后, 其父多憐君, 其母德交也。興龍洞建大刹云。

 

(5條) [禮賓寺正 季眞]

中郎將子季眞禮賓寺正, 舊譜有郎將之職。錦陽君書無今從之。

 

右五條, 泰仁公希吉所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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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료 해설>>

 

이 「태인공 희길소기」는 단순한 족보 서문이 아니라, 1615년(광해군 7)경 나주오씨 후손인 오희길吳希吉 선조님께서 자신이 족보를 편찬하게 된 경위와 오씨 가문의 내력을 설명한 중요한 기록입니다.

 

특히 다음 세 가지가 중요합니다.

 

1. 오씨 시원始原에 대한 인식

오희길 선조님은 "오씨는 변한弁韓에서 시작하여 신라에서 번성하였다"고 서술합니다.

이는 17세기 초 오씨 집안에서 이미 자신들의 뿌리를 변한弁韓ㆍ나주羅州 지역으로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2. 경순왕 부마설

오희길 선조님은 “오씨 선조가 경순왕의 부마가 되었다”고 기록합니다.

이 기록은 후대 오씨 족보에 보이는 "경순왕 부마"  전승의 비교적 이른 사례로 볼 수 있습니다.

다만 오희길 선조님 자신도 "그 이전의 계통은 증빙할 자료가 없다"고 적고 있어, 전승과 역사적 사실을 구별하려는 태도를 보입니다.

 

3. 장화왕후莊和王后와 오씨

고려 태조 왕건의 비인 장화왕후 오씨에 관하여는,

나주 흥룡동, 장화왕후 오씨, 아버지 다련군, 왕건과의 만남 등을 연결하여 오씨 가문의 역사적 위상을 설명하려고 한 것입니다.

이는 후대 오씨 족보가 장화왕후 계통을 중시하게 되는 배경을 보여주는 자료입니다.

 

 

이 문헌은 족보학적으로 상당히 가치가 있습니다. 특히 "만력 43년(1615)에 오희길 선조님이 직접 정서淨書했다"는 기록이 있어, 후대 족보보다 훨씬 이른 시기의 오씨 계보 인식을 보여주는 자료로 평가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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