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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헌] 금양군 소록(나주오씨 시조 및 원조에 관한 기록 등, 7世 겸 謙 작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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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양군 소록 錦陽君所錄

 

[註] <금양군 소록>은 나주오씨 최초 족보(1747년 발행 정묘보)에 실린 내용으로, 7世 겸謙(금양군, 1496-1582) 선조께서 작성하신 <‘금양군 유서(1575)>’ , <금양군 유서 추록(1578.04.15)> 및 <이시애 반란 평정기>에 관한 기록입니다.

 

[번역문]

 

(1조) [‘금양군 유서’ 중 나주오씨 가문의 시조와 원조에 대한 유기]

 

오씨吳氏의 선세先世는 나주羅州에서 나왔고 후손後孫들도 이곳에서 많이 살고 있지만, 세대世代가 이미 오래되었고 자손들도 쇠미衰微해져서 성姓을 시작한 조상祖上이 어느 시대時代의 사람인지를 알지 못한다.

 

향중鄕中의 옛 늙은이들이 간혹 전傳하는 말에 따르면 시조始祖가 중흥리中興里에서 출생出生하여 과거科擧에 급제해 가지고 신라新羅 조정에 벼슬을 하여 김부왕金傅王의 부마駙馬(왕의 사위)가 되었고,

 

그 후손後孫에 진사進士인 오숙규吳淑珪란 분이 있어 정랑正郞인 정수鄭隨와 급제及第한 정송수鄭松壽와 함께 중랑장中郞將인 정보유鄭寶儒의 사위가 되었으니 정송수는 바로 고려高麗의 시중侍中 정가신鄭可臣의 고考(돌아가신 아버지)요 오숙규吳淑珪는 바로 중랑장中郞將 휘언諱偃의 선조先祖라고 한다.

 

그러나 고증을 할만한 문적文籍이나 대수代數나 명휘名諱(돌아가신 분의 이름) 등을 상고할 길이 없다. 아! 상고할 길이 없기에 망녕된 말을 전傳할 수는 없지만 중랑장中郞將 이하 양조兩祖(오언, 오계진)의 유체遺體가 이곳에 모셔져 있으니 후예後裔된 자손으로 이곳에 살고 있는 자者가 원조遠祖를 추모하고 생각하지 않을 수가 있겠는가.

 

중랑장中郞將(휘언諱偃)께서 예빈시정禮賓寺正 휘계진諱季眞을 낳으셨고, 계진季眞이 공조참의工曹叅議 휘영달諱穎達을 낳으셨고, 영달穎達이 부사府使 신교愼交와 진사進士 신중愼中과 신의愼儀의 삼남三男을 낳으셨는데,

 

신교愼交가 경조敬祖ㆍ경친敬親ㆍ경장敬長을 낳으니 함께 경진년庚辰年(1460년)의 무과武科에 급제를 했으나 벼슬하지 않았다.

 

진사進士 신중愼中은 나성군羅城君 휘자치諱自治를 낳았고, (오자치는)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록됨으로써, 돌아가신 아버지(휘신중諱愼中)는 금성군錦城君을 증贈하게 되었고, 돌아가신 할아버지(휘영달諱穎達)는 공조참의工曹叅議를 증贈하게 되었다.

 

다음의 아우 신의愼儀는 그의 증손曾孫 습독習讀(관직) 명복命福이 영광靈光에서 살았다.

 

그리고 나성군羅城君의 후손과 경조敬祖 삼형제三兄弟의 후손들이 나주羅州의 삼가리三加里 광산촌廣山村에서 많이 살고 있고, 중랑장中郞將(휘언諱偃)과 예빈시정禮賓寺正(휘계진휘季眞)의 양조兩祖 묘墓는 광산촌廣山村의 남쪽 이삼백보二三百步의 거리에 있는데, 이곳을 ‘평가平檟’라고 부른다.

 

(2조) [‘금양군 유서’ 중 나주오씨 가문의 원조에 대한 유기 추록]

 

만력萬曆 3년 을해乙亥(선조 8년, 1575년) 이 책冊을 만들 때에는 진사進士 오숙규吳淑珪의 후손後孫 중랑장中郞將 오언吳偃에 이르는 그 사이의 연대年代가 너무나도 오래되어 조상祖上의 명휘名諱를 알아볼 길이 없어 항시 안타까운 생각이 많았는데, 만력萬曆 6년(선조 11년, 1578년) 4월에 향인鄕人 정몽호鄭夢虎가 자칭自稱 동보同譜를 한 선계先系라면서 오래된 족보族譜를 가지고 와서 나에게 보여 주었다.

 

내 상고해 보니, 오숙규吳淑珪가 정가신鄭可臣의 아버지와 더불어 같이 정보유鄭寶儒의 사위가 되어 있으며 그 휘諱는 정송수鄭松壽라 했고, 오숙규吳淑珪의 아들은 오경연吳慶延이요 그의 아들은 오광좌吳光佐라 하여, 명휘名諱와 세차世次를 분명하게 상고할 수 있다.

 

그런데 중랑장中郞將 오언吳偃 과 예빈시정禮賓寺正 오계진吳季眞 양조兩祖는 기록하지 않았고, 그 아래 무과武科에 급제한 오신교吳愼交가 김해수金海守를 지냈다고만 했다.

 

아! 세대世代가 오래되다 보니 각기 들은바 대로만 기록을 하여 보譜를 함으로 여러 문중의 기록한 바가 각기 자세仔細한 보譜와 소략疎畧한 보譜가 있어서 그리된 것일까?

 

중랑장中郞將 오언吳偃 할아버지 이하는 우리 문중에서 자상하게 알고 의심이 없는데 그 위의 양조兩祖 오경연吳慶延ㆍ오광좌吳光佐는 처음 이 보譜로 인因하여 알게 되었으니 몹시 기쁘고 다행스러운 일이므로 여기에 추록追錄해 두는 바이다.

 

만력萬曆 6년 무인戊寅(선조 11년, 1578년) 4월 15일 금양군錦陽君 겸謙 서書

 

(3조) [이시애 반란 평정기]

 

우리 할아버님(나성군 오자치)께서는 세조 정해년(1467년)에 이시애가 영북嶺北(함길도)에서 반란을 일으켰을 때, 과거(무과)에 급제하신 지 얼마 되지 않았으나 겸사복兼司僕으로서 선발되어 종군하셨다.

 

​이시애의 동생 이시합李施合이 길주吉州의 군영에 있었는데, 건장한 사람들을 뽑아 차운혁車云革과 함께 이시합을 결박하여 잡아 오게 하였다. 마침내 이시합을 사로잡아 돌아오는 길에 추격하는 기병들이 갑자기 들이닥쳐, 차운혁은 사로잡혀 죽음을 당하였고 할아버님께서는 급히 피하여 돌아오셨다.

 

​이시애가 죽임을 당하여(반란이 평정되어) (할아버님은) 차운혁과 함께 2등 공신에 나란히 책록되셨다. 이듬해(1468년) 4월에 당상관堂上官으로 승진하셨고, 7월에는 가선대부嘉善大夫에 오르며 나성군羅城君으로 봉해지셨다.

 

​할아버님께서는 독자이시라 고향에 내려가 부모님을 봉양하기를 원하셨다. 그런데 (낙향하셨다가) 상(부모상)을 당하시고, 시묘살이를 하시던 중에 본인도 병을 얻어 돌아가셨다.

 

​오른쪽(이상) 3개 조는 금양군(錦陽君, 오겸吳謙)이 기록한 바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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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문(표점)]

 

(1조) [‘금양군 유서’ 중 나주오씨 가문의 시조와 원조에 대한 유기]

 

吳氏之先, 出於羅州, 後裔多居之, 而世代已遠, 子孫衰微, 未知始姓之祖爲何代人。

鄕中舊老或傳, 始祖生於州之中興里, 登科仕新羅, 爲金傅王駙馬。

其後有進士吳淑珪, 與正郎鄭隨及第鄭松壽, 同爲中郎將鄭寶儒之婿。松壽卽高麗侍中鄭可臣之考。淑珪乃中郎將諱偃之先也。

云而可徵文籍代數名諱, 不得考焉。噫, 其不得考焉, 不可妄爲傳說矣。

而中郎將以下兩祖遺體, 實是安厝於此。爲後裔子孫居此者, 其可不爲之追遠而念之哉。

中郎將生禮賓正諱季眞, 季眞生工曹參議諱穎達。穎達生府使愼交、進士愼中、愼儀三男焉。

愼交生敬祖、敬親、敬長, 同登庚辰武擧不仕。

進士愼中生羅城君諱自治, 參敵愾功, 贈考錦城君。祖考則仍工曹參議次弟愼儀。曾孫習讀命福居靈光。

而羅城君之後敬祖三兄弟之後, 多居羅州三加里廣山村。中郎將、禮賓寺正兩祖墓在廣山村南二三百步, 俗號平檟。

 

(2조) [‘금양군 유서’ 중 나주오씨 가문의 원조에 대한 유기 추록]

 

萬曆乙亥歲成此冊時, 進士吳淑珪之後, 至中郎將吳偃, 其間年代則長遠, 而祖先名諱無從可憑考, 常多憫然者有之矣。

萬曆六年四月, 鄕人鄭夢虎自稱譜系云, 袖持久遠族譜, 以示予。

予考之則, 吳淑珪與鄭可臣之考, 同爲鄭寶儒之婿諱鄭松壽, 而吳淑珪子、吳慶延子、吳光佐名諱世次, 昭然可考矣。

而中郎將偃、禮賓正季眞兩祖, 又闕遺不錄, 其下以及第武科吳愼交、金海守云云。噫, 世代久遠, 記其所聞, 而爲譜諸門所錄, 互有詳略而然耶。

然中郎將偃祖以下, 則吾門所詳知而無疑矣。

其上兩祖慶延、光佐, 始得因是譜而知之, 深爲幸喜, 而追錄于此。

萬曆六年戊寅(一五七八年)四月十五日, 錦陽君 謙 書。

 

(3조) [이시애 반란 평정기]

 

惟我祖考,當世祖丁亥歲,李施愛叛于嶺北。

祖考登第未久,以兼司僕, 被選從軍。

施愛之弟施合, 在吉州軍中,擇壯健, 令與車云革縛。

致施合, 果得捕捉; 在途, 爲追騎突至。云革被執死之,祖考奔還。

施愛伏誅,與云革同參二等功臣。翼年四月, 陞堂上; 七月, 嘉善封君。

祖考獨子,願歸養下鄕。遭憂,居憂病卒。

右三條,錦陽君所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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